역사 이야기

기황후의 역사적 진실

화니-choi 2014. 2. 26. 17:06

1. 대제국을 지배한 여제 기황후

 

 

(기황후 : 중국 그림)

 

요즘 인기드라마 기황후가 얼마나 역사적 진실에 근거했는지?

얼마나 픽션을 더 했는지 궁금해서 기황후에 대하여 조사를 했습니다.

 

먼저 기황후의 생몰년도는 기록에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녀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변 인물로부터 그녀의 나이를 유추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되는 원나라 순제(혜종)는 1320년 출생해 14세가 되는 1333년에 등극 합니다.
기황후는 순제의 등극 기념 공물로 원나라에 간 듯 합니다.

 

당시 고려 공녀는 원나라에서 고관대작의 딸(처녀)을 원했으며

기황후는 할아버지가 최충헌 시절 높은 벼슬을 했고,

음서제도로 아버지도 정계에 출사했기에 공녀로 선발된 것 입니다


고려출신 원나라 환관 고용보에 의해 1333년 궁녀로서 순제에게 첫 선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던 만큼 공녀 역시 그에 맞춰 선발 되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공녀로 갈 때 기황후의 나이는 15~18세 사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기황후는 그야말로 공녀로 원에 가자마자 황제에게 선을 보였고,

첫눈에 황제를 사로잡아 총애를 받습니다.
1335년 당시 황후였던 타나시리가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순제는 총애하던 후궁인 기씨를 황후에 삼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되었고
1년뒤 광시의 한 절에서 한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문종이 죽자 연철목아는 명종의 장자 타환을 제켜놓고

그의 아우 6살짜리 영종을 황제로 옹립했으나
영종은 두달도 안 돼 병사했다.

 

이때 타환이 대도로 돌아왔으나 황위는 비어 놓고  2년만에

대승상 연철목아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맞이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타환이 황위에 오르는것을 승인 해서 타환은 즉위하니 그때 나이가 13세 이었다
타환이 황위에 오르고 얼마안되어 대승상 연철이 병사하고

정권은 우승상이던 백안(伯顔)에게 넘어갔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환이 황위에 오른지 2년후인 1335년 연철의 아들 당기세가 반역을 시도하다
적발되어 그의 동생이자 황후인 타나실리도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된다
그러니까 사실은 명종의 혈서도, 연철이 타환을 위협한것도 모두
역사적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픽션)이다

타나시리의 친정(연철, 당기세형제등)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백안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한 것이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순제를 대주주로 한 원제국의 황후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원 제국의 또 다른 대주주였던 백안이 적극 반대하고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황후로는 기 황후를 정후로 맞이하려 한 순제의 뜻과 달리
백안은 1338년 3월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해 온 홍길자(弘吉刺) 가문의

백안홀도(伯顔忽都)를 정후로 맞이했다.

이에 기씨는 좌절하지 않고 그녀는 백안까지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실권을 행사한 1340년부터

중국 대륙에선 한족(漢族)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원나라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기록은 반란의 원인을 기 황후 일당이 상벌의 원칙을 무너뜨린 문란한 정치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1353년 6월 기 황후의 아들 아유식리다라(愛猶識理達獵)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정후(正后)의 아들이 있는데도 기 황후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기 황후는 마음대로 정치를 요리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사’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했다”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대주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태만해도 최고경영자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하였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에게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가 
1365년 7월 반란이 진압되고,

이어 정후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해 12월 기 황후는 제1 황후가 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원나라 멸망 3년 전이었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이때 기황후는 아들과 연경을 쫓겨나 2년동안 몽골초원에서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그곳에서 1368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사망원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사한듯) 합니다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기황후가 죽은지 3년후인

1371년 막북의 카라코룸에서 북원을 세우고 스스로 "빌릭투 칸"이라 칭하고

북원의 대칸(원나라 황제와는 다름)이 되어 초원에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몽골세력을 규합해 재정비하고 다시 과거의 제국의 강역을 회복코자 합니다.

 고려의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습니다.
원순제는 원비와 후궁으로부터 모두 6남 5녀를 낳았는데,

그중 장남인 아유르시리다르 만이 기황후 소생 입니다.

 

***** 기황후의 친인척  *************

 

기황후가 우리 민족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는
오빠 기철(奇轍) 등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철은 「고려사」반역조에 올라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기철은 동생 덕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임명되면서 고려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서
공민왕이 조카인 태자에게 무릎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왕에 앞서 이씨에게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가 호위군사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시를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여기에 조카 기삼만 등 친족들이

백성들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기철은 1356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공민왕에게 주살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태자에게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했다.


1364년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한 후 충선왕의 3자 덕흥군(德興君)을 왕에 책봉하고
최유에게 1만 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하면서 친정 복권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  북쪽으로 쫒겨난 원나라(북원)의 역사   ***********

 

1366년 원나라 수도 연경이 주원장에게 함락되자
몽골 내륙으로 기황후는 아들과 쫓겨나는데
고비사막이북의 몽골초원으로 돌아가

1371년 막북의 카라코룸에서 북원을 세우고 스스로 "빌릭투 칸"이라 칭하고

북원의 대칸이 되어 초원에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몽골세력을 규합해 재정비하고

다시 과거의 제국의 강역을 회복코자 합니다.

따라서 역사에서는 대도 연경시절을 원나라,

몽골초원으로 쫓겨간 이후에는 북원 이라고 칭합니다  

1372년 명나라 주원장(홍무제)는 중로군, 동로군, 서로군의 15만 대병을 동원하여
그의 유능한 장수들인 서달徐達, 이문충李文忠, 풍승馮勝을 3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한 후 3로로 진격하여 사방에서 카라코룸의 북원세력을 향해 포위해 북상하여
북원제국을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이에 북원군은 대칸인 '빌릭투 칸'과 그의 동생 '터구스-테무르(Togus-Temur)'의 영도하에
명군과 격전을 치르며 명군은 서달徐達의 중로군이 톨라강가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몰살을 당하고
동로군이 연이어 패배하므로써 2로의 대군이 무너지고 서로군만 남습니다.

 

서로군만으로는 북원과 대결이 불가해지어 홍무제는 명군의 후퇴를 명하게 되며
사실상 이 기회에 북방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완전히 통일코자 하던 홍무제의 희망은 무너집니다.

 

몽골사료에 따르면 대원제국의 멸망속에서 초원으로 돌아와 다시 과거의 유목제국들처럼
막북에 북원제국을 수립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방에서의 명의 위협을 물리친
"빌릭투 칸"은 명에 포로로 잡혀간 1378년 41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아이유시리다라(빌릭투 칸)는 후사를 두지 못했으며
제위는 빌릭투칸의 동생인 순제의 네번째 아들인 토구스 테무르
(어머니는 순제의 후비 바야우트)에게로 이어집니다.

 

토구스 테무르(1342 ~ 1388)는 영효황제(寧孝皇帝)이고, 몽골식 재위명은 우스칼 칸 이다.
순제의 4남이며, 소종의 이복 동생으로, 본시 익왕(益王)으로 불렸다.
1378년 5월 형인 소종이 죽자 유조를 받아 조카들 대신 황위에 즉위하였다.

 

1381년 명은 운남성을 공격했다. 1382년 1월 6일 운남을 지키던 운양왕 파잡랄와이밀은 자살했다.
1382년 4월 7일 남옥(藍玉), 목영(沐英)이 대리성을 공격하자 대리는 항복했다.
1387년 6월 풍승(馮勝), 부우덕(傅友德), 남옥 등이 북벌해 금산(만주)의 나하추(納哈出)를 공격했다.
1387년 10월  몇 번의 싸움 후 나하추는 명에 항복했으며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1388년 5월 18일 그는 부이르 누르(貝爾湖)에서 명나라의 습격을 당해 대패했으며 
이때 차남, 식솔 3천, 남녀 7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자신은 태자, 승상 실열문(失烈門)등 수십 기와 도주했다.
1388년 10월 이수데르(也速迭兒)에게 토구스테무르는 장자와 함께 살해 당했다.

 

장자 : 天保奴 (~1388년) : 이수데르에게 살해당했으며 이때 승상 실열문은 명에 항복했다.
어머니는 바야우트 씨이다.
차남 : 地保奴 : 부이르 누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388년 8월 8일  명나라에 의해 유구(琉球)로 유배당함으로써

 몽골제국 징기스칸의 적통으로 승계받은 대칸이자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황통은 여기서 단절되었다.

 

 

 

 

 

******** 몽골제국 칸 계보  **********

 

1대 칸 : 칭기즈 칸 (1206년~1227년) (孛兒只斤鐵木真)
2대 칸 :오고타이 칸 (1229년~1241년) (~窩闊臺)
3대 칸 : 구유크 칸 (1246년~1248년) (~貴由)
4대 칸 : 몽케 칸 (1251년~1259년) (~蒙哥)
5대 칸 : 쿠빌라이 칸 (1260년~1294년) (~忽必烈)

 

******* 원 나라 왕 계보  **********

 

1대 : 세조 쿠빌라이 (1215 ~ 1294) : 몽골제국  5대칸
2대 : 성종 테무르 (1294 ~ 1307)
3대 : 무종 해산 (1307 ~ 1311)
4대 :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1311 ~ 1320)
5대 : 영종 시디발라 (1320 ~ 1323)
6대 : 태정제 예순 테무르 (1323 ~ 1328)
7대 : 천순제 라기바흐 (1328)
8대 : 문종 그 테무르 (1328 ~ 1329, 1329 ~ 1332) 혜종의 아버지 즉 기황후의 시아버지
9대 : 명종 쿠살라 (1329)
10대 : 영종 린친발 (1332) 명종의 차남 즉 혜종의 동생

 

****** 북원 칸 계보 **************


11대 : 혜종 토곤 테무르[순제] (1333 ~ 1368) (북원 1대왕) : 기황후 남편
문종 그 테무르의 장남.
엔티무르(연철)에게 아버지를 잃고 숙부 투크테무르칸에게도 미움을 받아
고려,티벳과 광서성 일대를 떠도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족,고려인들과 같이자라난 그는 타민족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훗날 기씨황후를 황후로 맞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엔티무르(연철)는 자기 딸을 억지로 그와 결혼시킨 뒤 그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태평왕(太平王)이 되어 실제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인 엔티무르(연철)에게 복수의 칼을 갈던 그는,
쿠빌라이 칸 시절 맹장 바얀의 후예인 바얀[伯顔]과,그 조카 토크타와 손을 잡고
결국 엔티무르(연철) 일문을 멸족시키고 부친과 동생의 원수를 갚았다.
 
초창기의 혜종은 성군이었다.소수민족에 너그러웠으며,
숙부 투크테무르칸을 미워했지만 그의 훌륭한 정책을 계승하려 애를 썼다.
한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를 집필하고,
한때 원나라 문화의 최성기를 이루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 공녀로 온 기씨(奇氏)성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본 그는,
소녀에게 푹 빠져 결국 그녀를 황후로 세웠다.
엔티무르(연철)를 제거한 것도,실은 그녀를 황후로 세우기 위해 엔티무르의 딸을
폐위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씨소녀 역시 처음에는 고려의 앞선문화를 원나라에 도입하는데에 힘을 쓰고
국본이라는 황태자를 임신하는 등 황후로써 손색이 없었으나,
점점 그녀에게 빠져 안이해져만 가는 황제는 이미 유약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영종 시데바르라 칸 이후로 원의 재정은 상당히 궁핍하였고,
혜종(타환)도 재정면에는 그리 큰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천재지변까지 겹쳐 결국 혜종 말년 중국 각지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
홍건의 총대장 주원장은 순식간에 남경을 정복하고,북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결국 1368년,그가 황제에 오른 지 36년 만에 북경은 함락되었고,
그는 상도(上都:카라코룸)과 응창(應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성군이 되도록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던
그는 백성들이 전화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에서 세가 불리함을 알자 전쟁을 치르지 않고
북경을 주원장에게 내주었다.
주원장은 그의 태도에 감복하여 명나라를 세운 뒤 그에게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는데,
대세에 순응하여 희생을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였다.

 
[제12대] 기황후의 아들 : 아유르치리타드라칸 1370~1378
묘호:소종(昭宗)
 
-무참히 꺾여버린 원대했던 코리안드림-
혜종과 기황후의 맏아들.고려인의 기상을 이어받아 능력이 뛰어났다.
고려인 핏줄로 대원의 황위를 계승하여 위대한 황제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홍건적에 밀려 응창까지 후퇴한 그는 응창에서 명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대패하여 아들 마이트레야바라를 위시하여 수백의 친족들이 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중원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을 겪고 말았다.
 
그러나 만슈리아,감숙지역과 티벳,운남,귀주지역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황제로 모셨으며,
1372년 주원장은 서달이란 장수에게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몽골고원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직접 진두지휘한 그와 그의 심복으로 원말의 마지막 맹장이던 쿠쿠테무르는
톨강에서 15만의 명군을 모조리 전멸시키는 기지를 발휘해 몽골의 마지막 불꽃을 타올렸다.

 
어머니인 기황후가 죽은지 10년후인 1378년

중원에 포로로 끌려간 가족들을 그리다 카라코룸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그가 죽고 곧 토쿠스 테무르도 죽어 마지막 불꽃을 타올리던 원의 세력은 급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3대]
토쿠스 우스길 테무르칸 : 1378~1388 - 대원제국 마지막 황제-
 
혜종
의 아들로 소종의 이복동생.
이복형인 소종(타환) 시절 잘라이르부족의 나하추[納哈出]와 함께

원나라 군의 좌우익을 맡은 맹장이었다.
형이 죽자 제위를 계승, 명나라에게 빼앗긴 내몽고 쿠룬 부유르를 탈환하고
한때 금방이라도 북경을 위협할 태세를 갖추어 형의 유지를 잘 잇는 듯 했다.
 
그러나 좌익을 담당했던 잘라이르 나하추가 이끄는 20만 대군이

명의 풍승에게 어이없게도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하추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나, 군량미를 명에 약탈당하고
명의 꾀임에 넘어가 원을 배신했던 것이다.
그후 나하추는 명의 장수가 되어 운남 정벌에 참여하다가 병사했다.

(여기서 나하추와 고려와의 이야기는 아래에 별도로 언급함)
 
믿었던 나하추의 배신에 치를 떨던 그는 동부 노르호반 지역으로 후퇴하여
어머니의 나라 고려에 연락을 취해 명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친원과 친명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하고있던

고려는 최영과 우왕의 의지에 힘입어서 원군을 뒤늦게 파견했으나

친명파인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머무르면서 관망하고 있어서.....결국 원군의 도움 없이

1388년 명의 장수 남옥을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인해 패배하고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부하인 이스테르에게 살해되었다.
 
이스테르는 쿠빌라이칸의 동생인 아리크 부케의 후손으로,

오이라트 부족의 지지를 받아 대원제국의 황제가 아닌 몽골제국의 칸으로 그 위를 이었다.
원(元)이라는 국호는 폐지되었으며
그의 사후 오이라트의 야선(에센,也先)이 대원 천성대가한을 칭했을뿐
몽골의 칸 그 누구도 원나라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세계역사상 유일의 초강대국 대원제국은
13대(추존 황제포함 15대) 128년만에
그 장엄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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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원나라 황제를 칭하지 않고 몽골 칸으로 불리운다.
엥흐 조리그투 칸 (Enkh Zorigt Khan) - 아릭부케 가문 출신.
엘베크 니굴세그츠 칸 (Elbeg Niguulsegch Khan)
군트므르 칸 (Guntumur Khan)
을지트므르 칸 (Ulzitumur Khan)
델베그 칸 (Delbeg Khan)
아자이 칸 (Ajai Khan)
타이손 칸 (Taisan Khan)
에센 칸 (Esentaish Khan)
메르코스우헤그트칸 (Merkus Uhegt Khan)
멀런칸 (Molon Khan)
만돌칸 (Manduul Khan)
바트문크 다얀칸 (Batmunkh Dayan Khan) :북원의 중흥기
바르스볼트 저넌칸 (Barsbold Jonon Khan)
보디 알라크칸 (Bodialag Khan)
다라이손 구덴칸 (Daraisan Guden Khan)
투멘 자사그트칸 (Tumen Zasagt Khan)
보얀 체첸칸 (Buyantsetsen Khan)
리그 호타그트칸 (Ligden Hutagt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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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년 명은 만주의 나하추와 일전을 벌인다.
더군다나 당시 북원의 대칸 투구스 테무르(아유시리다라의 아들)는
나하추와 연합하여 명을 치고자, 동몽골의 부이르 호수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명-나가추, 북원 간의 건곤일척의 대전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런데 전쟁의 결과는 매우 싱거웠다.
나하추가 20만 대군을 명나라 군에게 투항했던 것이었다.
나하추의 투항으로 전세의 판도는 급격히 바뀌었다.

 
투구스 테무르는 비록 북원의 칸이었지만 전력의 상당부분을
나하추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고,
따라서 나하추가 대군을 이끌고 명에 투항해 버리자,
북원의 군세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결국 1388년 5월 남옥이 이끄는 명군은 부이르 호수까지 북상하여
투구스 테무르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북원 정권은 와해되었다.

 

-------- 이시기의 고려 정치상황 참조 -----

 

이성계가 무장으로써 본격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 나하추와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362년 동북면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는 젊은 무장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상승장군'의 길을 걷게 되었던 전투일 뿐 아니라,
14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원 말기 원의 조정이 내분과 반란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나하추 역시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요동 지역의 군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심양행성 승상을 자칭하면서 독자적 군벌세력이 되었다. 
나하추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요동 전역으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요동의 나하추가 고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할 지역이 지금의 함흥 일대였던 쌍성총관부 일대였다.
본래 쌍성총관부는 고려의 동북 변경지역이었으나,
몽골이 침입할 때 조휘 등이 몽골에 투항하였고,
몽골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고려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그곳의 고려인 세력을 만호와 천호로 임명하여 회유하였다.

 
그런데, 1356년 고려가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를 파견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고,
당시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등의 내통을 통해,
결국 쌍성총관부는 다시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쌍성총관이었던 사람은 몽골에 항복했던 조휘의 손자 조소생이었는데,
조소생은 쌍성총관부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나하추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요동과 고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나하추는

함경도 북청과 흥원 일대로 공격해 들어갔다.
당시 동북면의 고려군은 나하추의 군단에게 속수무책이었고,
고려는 다시금 동북면을 몽골군에게 빼앗길 상황이었다.
동북면에서는 고려 조정에 원군을 보내달라는 전령을 보냈고,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파견하였다. 당시 이성계는 신예장수였다.

 
물론 개경 수복전에서 가병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지휘를 받는 부장으로 참전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직접 지휘를 하는 사령관으로써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성계로써는 자신이 사령관으로의 능력을 검증받는 전쟁이었다.

 
또한 나하추를 위시하는 몽골에게 있어서도 다시금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를 둔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나하추의 전력은 수만,
이성계의 전력은 수백에서 수천이었다. 10배가 훨씬 넘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 군대가 나하추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의 뛰어난 지도력과 무술 실력도 있었지만,
함경도의 지리에 익숙했던 이성계의 전략이 주효했던 것을 들 수 있다

 

 

--- 추가 사항 ------

 

1388년 5월18일 명나라가 남옥을 북원에 출정시켜 북원을 멸망시킨 시기이어서
1388년 4월에 출정한 이성계군은 5월 위화도에 도착할 즈음엔
명나라 요동을 통해서 명나라가 북원을 정벌하기위해 대군을 보냈다는 정보를 받았을 겁니다.
아마 여진인들과 밀접한 관계로(함흥쪽이 근거지니까)
이성계라면 만주쪽에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죠.

 

위화도에서 노심초사하던 이성계는 1388년 5월 22일 비가 많은 오고 등등
유명한 4불가론으로 위화도 회군을 했습니다.
요동정벌 총사령관 최영과 우왕은 이성계에게 당하고 조선이 건국됩니다.
여기서 이성계의 의견처럼 과연 5만명으로 요동정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당시 명나라는 북쪽으로 도망간 원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정예병력 대부분이 몽골로 향했기에
초반전에는 무주공산으로 요동을 정벌이 가능했고

일단 만주는 우리것이 되었을 것 입니다.


당시 명은 요동에 군사가 5000천도 안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5만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군이고,

위에서 언급한 나하추에게 승전한 이성계,
홍건적을 물리친 최영 등 북쪽의 군사들과 승리한 맹장들 이었지요.


하지만......
원나라를 정벌한 명나라 정예군은

그 칼날을 북쪽으로 돌려 요동으로 쳐들어와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겠지요
다만 수천리를 허겁지겁 달려온 명나라 군사와는 달리

싸움을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고려의 5만 대군이 붙었다면....
한번 해 볼만한 싸움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가 한번 이겼다고 하더라도,
이후 우리는 요동을 지키기위해서 여러번의 싸움을 하겠지요.
다행히 북원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고
이후에도 명나라를 칩입해서 한때는 수도인 장안성을 위협하기도 했고,
명나라가 망할때까지 몽고의 침입을 수시로 받았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중국중심부 즉 중원 정벌 몰라도,

요동을 지키는 정도는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명나라가 이후 북원 몽골과 아주 심하게 싸울때에
우리는 문화에 치중해서 세종의 문화 황금기를 맞이 합니다.

최영장군과 우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 이성계 불가론의 의문점 -------
1. 위화도 회군한 5월22일이 우기였을까!

  (우리나라의 우기는 6월말~7월말이고, 만주는 이보다 약간 늦음)
2. 우기이어서 활이 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안 나가면 적도 안 나간다 : 같은 조건)
3.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명은 이제 태어나는 신생국이며, 조선건국 초기 이성계와 정도전이 북벌을 계획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이 뒤엎고 북벌을 추진한 것이 말이 안된다.)

 

====> 자료를 조사하느라 몇일 걸렸으며

      일부 사료는 기황후의 사망시기를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일부는 연철승상이 타환이 황위에 오르기전에 병사했다고 하는등 혼선이 있었으나

      여러자료를 검토한 결과를 나름 종합해서 작성 했음에도

      100% 정확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 감사합니다 ----